모형들의 세계 ㄱ씨
관광지에서의 인상적인 경험을 오롯이 집으로 가지고 돌아가고 싶은 방문객들이 있을 것이다. 그들은 현지의 기념품 샵에서 거대한 랜드마크를 축소한 미니어처 모형들을 발견하게 된다. 작은 세상을 굽어보는 일은 현장을 직접 거니는 것과는 다르지만 이러한 경험의 간극을 메꿀 모종의 상상력을 자극할 수는 있다. 모형을 매개로 되살아나는 기억이 얼마나 생생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미니어처 기념품을 구입하는 순간만큼은 그 포터블한 세상의 조각에 현장에서 보고 느낀 감각이 담겨있는 듯 여겨지기도 한다.
전시를 보는 관객의 경험은 어떨까? 관객은 관람을 마친 후에 무엇을 자신의 것으로 가져갈 수 있을까? 〈관람 스코어〉의 기록, 실천, 수행은 항상 이런 종류의 화두에 닿아 있다. 어떤 것을 관객에게 '되돌려준다' 또는 '이양한다'는 민주적인 지향점을 문자 그대로 확장한 질문처럼 보이기도 한다. 시점을 돌려주고, 해석의 권한을 돌려주고, 관객을 끊임없이 주체적인 위치로 이끌어야 할 대상으로 설정하는 것은 다소 피로감을 불러일으키는 목표일 수 있는데, 이 정치적 목표를 진행하는 주체가 누구인지, 또 정말 그런 일을 해야만 하는지, 얼마나 성공할 수 있을 것인지는 이 글에서 별로 중요하게 다루지 않는다. 그보다는 공간과 맞물려 발생하고, 벌어지고 나서는 관객의 기억과 몸에 남는 '경험'을 기록하고 소유하는 방법과 그렇게 하고자하는 욕구에 대해 말해보려고 한다.
예전에 생각한 방법은 전시장의 미니어처 모형을 만들어 관객에게 배포하는 것이었다. 아마도 전시된 작품에 대응되는 미니멀한 기호들이 프린트된 적당한 두께와 재질의 종이에 영리하게 재단선을 넣은 물건일 것이다. 관객은 각자 재단된 부분을 뜯어내고 평면으로부터 전시장의 입체 모형을 '일으켜 세울 수' 있다. 마치 팝업북의 한 페이지를 펼치는 것처럼. 손상되기 쉽고 따라서 금방 버려질 확률도 높은 종이 모형이 머릿속에 존재하는 기억보다 전시의 관람 경험을 보존하는 데 용이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어쩌면 그저 집으로 '가지고 돌아갈 수 있는 물건'이라는 것에 너무 많은 의미를 부여한 아이디어일지 모른다. 경험을 매개하는 사물이 전시장을 떠난 관객을 따라 만들어낼 또 하나의 이동 궤적을 상상하게 만드는. 사실 '가지고 돌아갈 수 있는 전시 모형'은 이미 대부분의 전시장에서 높은 확률로 만날 수 있고, 대개 이것은 리플릿에 인쇄된 전시 도면이다. 현시원 기획자는 2017년 전시 《도면함》의 서문에서, 관객이 쥐게 되는 도면을 이루는 “종이라는 물질의 강인함과 취약함"을 말한 적이 있다. 나는 이것이 실재하는 하나의 전시라는 단단함과, 그에 대한 관객 각자의 다양한 경험 가능성이라는 유연함을 담아내는 도면의 성격을 말해준다고 이해했다. 우선 격주로의 관람 스코어에서 도면은 그 위에 관객의 관람 동선을 그려 넣어 완성할 수 있는 비어 있는 악보처럼 활용되었다. 나아가 이 동선 기록이 담긴 도면은, 기호와 재단선을 넣은 종이 대신 디지털 공간 속에서 '일으켜 세워'질 수 있었다.
디지털 공간에 ‘일으켜 세워진' 도면, 전시장의 3D 모형은 격주로의 2019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린 하룬 파로키(Harun Farocki) 개인전 《하룬 파로키 - 우리는 무엇으로 사는가》의 리뷰에서 처음 활용되었다. 손 위에 올려놓을 수 있는 물리적 실체를 가진 것은 아니지만, 디지털 공간 속에 존재하는 미니어처 모형인 셈이다. 이 모형은 서로 다른 두 개의 시점에서 바라볼 수 있고, 이 서로 다른 시점은 서로 다른 두 종류의 경험을 기록하고, 재현한다. 하나는 전체 공간을 아우르며 위에서 내려다보는 시점이며, 다른 하나는 본래 개개인의 관람 경험과 비교적 유사한 일인칭시점이다. 전자의 시점은 전시 도면에 이미 제시되어 있고, 후자의 시점은 관객이 찍은 작품 사진 속에 남아 있곤 한다. 이 중 어떤 것이 관객의 관람 경험, 한번 벌어지고 지나가는 그 실제의 경험을 기록하고 보존하는 형태로 맞을까? 또는 경험된 공간을 재현하는 방식에 맞다고 할 수 있을까? 사실 양자 중 꼭 하나를 택할 이유는 없다. 두 시점 모두가 각자의 위치에서 전시 경험을 다루는 자체의 관점을 구성하고 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하나의 3D 모형을 가지고 둘을 동시에 구현하는 데에는 전혀 기술적인 어려움이 없기도 하다.
그럼 이제 지나간 관객의 관람 경험을 돌이킬, 게다가 언제든 두 개의 시점에서 둘러볼 수 있는 미니어처 전시 모형이 만들어졌다고 할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답을 내리기 전에 작업의 또 다른 특징을 말하려 한다. 앞서 설명했듯이 이 모형은 현실 공간은 아니더라도 재생 가능한 그 어떤 기기 안에라도 디지털 파일의 형태로 존재할 수 있고, 나아가 다시 공간을 거니는 듯한 일인칭시점의 경험 역시 담고 있다.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모형 속에는 본래의 현장을 재현하는 세부사항들이 있다. 하지만 이 세부사항들은 원본, 실제의 전시 공간을 최대한 정확히 옮겨오려 노력한 결과물은 아니다. 이것들은 각 격주로 구성원 - 관객이 가히 산발적인 위치에서(마찬가지로 이 '산발적인 위치'는일인칭 관람 경험을 제공하는 VR 전시 이미지들과 비교할 때 더더욱 두드러진다) 선택적으로 촬영한 작품 사진이 덧대어진 모습들과, 공간 전체를 렌더링하는 색 혹은 선의 스타일로 나타난다.
원래 《하룬 파로키 - 우리는 무엇으로 사는가》의 전시 모형은 리뷰 콘텐츠에 삽입할 영상 자료로 만들어진 것이다. 주된 이유 중 하나는 적어도 이것이다. 당시에는 전시장 내부에서 사진 촬영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리플릿을 기반으로 3D 공간의 골격과 작품의 매스(덩어리)를 만들고, 그 위에 리플릿에서 발췌한 이미지와 텍스트, 전시를 관람한 각 멤버의 이동 동선과 관람 시간, 촬영이 허용된 전시실 외부를 찍은 사진들을 덧대었다. 전시된 작품 모두가 영상 작업이었기에 가상 전시 공간 곳곳에는 화면이 텅 빈 모니터나 스크린을 세웠다. 이 빈 화면들은, 일견 관객 각자의 기억으로 채워지길 기다리고 있는 듯하다. 모형 안에는 이처럼 관객의 기억을 통해 보완되어야 할 '빈틈' 들이 포진해 있다. 때로는 공간과 작품 자체에 대한 왜곡이나 변형도 이루어졌다. 도면에 표시되어 있지도 않고 리플릿에 사진이 실려있지도 않은 작품이나 설치물의 구체적인 형태와 위치는 작업자의 주관적인 기억에 기초해 만들어야 했다. 결국 전체 모형은 실제 공간의 정보를 담고 있는 동시에 개인의 경험에 의해 재구성된 것이다.
재현된 전시 공간이 실제 전시 공간과 정확히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기술적인 한계를 넘어서 그것이 애초에 지향된, 혹은 최소한 너그럽게 허용된 바라면? 우선 전시 관람을, 분명한 물리적 실재로 존재하는 전시 공간 속에 관객의 몸이 진입했다가 빠져나오는 과정이라고 상상해보자. 전시장을 벗어난 관객의 경험은 관객 자신의 기억(때로는 신체)에 남는다. 하지만 이 경험은 관객만이 아닌, 전시와 전시가 펼쳐진 공간과의 상호 작용 속에서 형성된 것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관객의 관람 경험은 작품 및 전시 공간과 맞물려 있다. 불완전한 모형으로 재현된 관람 공간은 이 ‘맞물림'을 기록하는 하나의 방식이다. 이 방식은 천연덕스럽게도 실재하는 전시 공간을, 관객이 감각한 주관적 전시 공간으로 바꿔치기하려는 듯 보이기도 한다.
좀 더 객관적인 관점에서 공간과 관람 경험 사이의 이 맞물림에 접근할 수도 있다. 「전시동선의 이동특성에 관한 연구」에서 임채진은 "전시물과 전시 공간이라는 물리적 여건에 대해 (관객이) 어떠한 반응을 일으키는가"를 토대로 전시의 동선 계획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연구는 전시 동선의 이동 특성을 전시 성격과 관련된 공간적 요인과 관람 행태에 의한 행태적 요인으로 나누어 분석하고 있다. 이 중 공간적 요인은 다시 전시 방법과 전시 공간으로 나뉘는데, 여기에는 전시 내용, 연출과 밀도, 전시의 길이와 같은 전시의 구성을 이루는 요소와 더불어 전시실의 면적, 전시실 수, 출입구의 위치, 전시실 폭과 같은 공간의 물리적 요소가 포함되어 있다. 전시 관객의 경험이나, 행동과 공간의 관계를 탐구한 또 다른 논문 「미술관의 벽구성에 따른 공간속성과 전개방법에 관한 연구」는 전시실의 공간 속성인 벽의 구성과 전개에 따라 유도되는 관객의 시각성 및 감상 행위를 다룬다.
물리적 공간, 전시 방식에 따라 발생하는 관객의 공통된 감각을 규명하는 일은 필요하다. 간단히 말하면 이것은 창작자와 관객 사이에 최소한의 공통 분모를 만들려는 시도가 아닐까? 격주로에서 작업한 전시 모형도 결국은 하나의 도면에서 출발한다. 결국 주관적인 공간 모형은 실제의 전시 공간을 바꿔치기하거나, 부정하거나 지우려는 것이 아니다. 관객 각각의 관람 경험으로 재구성된 전시가, 창작자가 손수 만들어낸 실제 전시 자체보다 중요함을 보여주고 싶은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구태여 (완전하게든 불완전하게든, 주관적이든 객관적이든) 자신의 관람 경험을 기록하고 보전하여 또 하나의 공간을 ‘만들어내고’ 싶어 하는 욕구와, 이러한 공간으로 채워질 일종의 2차적 생산물들의 세계(어쩌면 리뷰들의 세계, 모형들의 세계)이다.
이 모형들은 단지 원본을 테이블이나 손바닥 위에 올려놓을 수 있는 상태로 축소한 것만이 아니다. 모형 각각은 현장을 경험한 관객들 각자가 내재화한 가시성의 체계에 따라 되살려져 있다. 즉 그가 무엇을 보고 무엇을 보지 못했는지, 어떤 것을 기억하고 기억하지 못했는지, 가시성을 불러일으키는 어떤 신체적, 문화적 경험에 접촉하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크리스타 블륌링거(Christa Blumlinger)의 「하룬 파로키의 가시성에 관한 물음」에 따르면, 푸코의 ‘가시성의 명명’에 대한 작업들과 궤를 같이하면서 시청각 아카이브의 정치적 재구성에 뛰어드는 일은 하룬 파로키같은 위대한 창작자들의 몫이다. (물론 그렇다. 그처럼 정교하게 문제의식과 창작 방법론을 다듬을 능력이 ‘우리 모두’에게 있을 리는 없다.)
다소 무책임한 소리 같지만 우리가 보고 느낀 것을, 전시장 안에서 휘발되어버릴 경험을 기록할 새로운 방법을 고안해내고자 마음 먹은 순간 이런 모형들은 무수히 만들어진다. 이 역시 무책임한 소리 같지만, 자신만의 경험 기록을 만들어내는 방법과, 그 과정에 들일 시간과 노력의 정도 역시 자유롭게 조정할 수 있다. 이것은 창작자이자 관객의 중간 지점에 놓인 이들에게 허락되는 특권같기도 하다. 이 특권은 각자의 위치와 사정 안에서 볼 수 있는 것들을 보고(자신의 가시성의 체계를 드러내고), 말할 수 있는 것들을 말하는 이들을 더 많이 불러모으는 역할을 한다. 격주로의 관람 스코어 중 전시장의 3D 모형은 관객 각자가 자신의 경험에 대해 짤막한 코멘트, 트윗, 유튜브 리뷰를 재차 하나 더 만들어 내면서 형성될 세계에 대한 상상을 품고 있다. 그리고 그 모형들의 세계에서 만들어질 수 있는 것들에 대한 비교적 낙관적인 기대를 보여준다. 갖고 가기 쉽지 않은 무언가를, 관객 각자의 경험을 본인의 공간으로 가지고 가고 싶다는 욕구가 자유로이 펼쳐지는 순간 만들어지는 것, 그러한 욕구를 담을 수 있는 세계, 그것이 바로 모형들의 세계다.
참고 자료
《도면함》(시청각, 2017) 서문
“즉 전시장에서의 도면(핸드아웃 또는 리플렛)은 관람자들의 동선을 제안하고 예측하기 위한 것인데 이 역할 또한 반전된다. 공간에 들어온 관람자들은 제시된 도면을 손에 쥐기는 하지만 이 종이라는 물질의 강인함과 취약함이 동시에 작동한다.”
격주로 인터뷰 시리즈 [3화] 현시원 기획자 - 기획과 관객
“건축에서의 도면이 아닌 전시에서의 도면에 집중하게 된 것이 핵심이라고 생각합니다. 전시장에서의 도면은 도면 자체를 생각한다는 출발점 자체가 한 개인의 연구이자 미술을 보는 독립적인 시각입니다. 격주로도 ‘동선을 기록하는 포맷’으로 살펴보신 것처럼요.”
참고 문헌
임채진, 박종래, 「전시동선의 이동특성에 관한 연구」, 『한국실내디자인학회 논문집』 no.17, 1998
이종숙, 임채진, 「미술관의 벽구성에 따른 공간속성과 전개방법에 관한 연구」, 『대한건축학회 논문집 - 계획계』 제25권 제6호, 2009
크리스타 블륌링서(Christa Blumlinger), 「하룬 파로키의 가시성에 관한 물음」, 『하룬 파로키 - 우리는 무엇으로 사는가?』, 국립현대미술관, 2018
스크린샷 전시
《하룬 파로키 - 우리는 무엇으로 사는가》(국립현대미술관, 2019)
《안은미래》(서울시립미술관, 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