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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객 경험과 스코어에 대한 단상

-부산비엔날레 관람 경험을 중심으로                                                                                  ㅡ씨

처음에 나는 부산현대미술관의 관람 동선을 기록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편하게 전시장 입구를 들어섰다. 커다란 목탄 그림을 보려는데 갑자기 안내 책자에 끼워두었던 엽서 한 장이 바닥에 툭 떨어졌다. 전날 부산 원도심 문화공간 ‘워크숍'에서 가져온 엽서였다. 그 순간, 미술관에 서 있던 내 몸에 어제의 감각이 불쑥 비집고 들어오는 듯했다. 잔잔한 소음과 적당한 온습도의 실내공기로 채워진 층고 높은 공간에 분명히 서 있는 내 안에서 부산 거리를 걷던 어제의 감각이 되살아났다. 이 관람이 특별하다고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그래서 기록을 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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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비엔날레 안내 책자에서 현대미술관 1층 도면이 그려진 페이지를 펼쳤다. 우선 미술관 밖에서 안으로 들어오고, 물품 보관함에 가서 샤프를 꺼내오는 동선까지 기록했다. 그 다음에 글씨를 흘려 쓰며 관람과 동시에 기록하기 시작했다. 순전히 관람만 하는 상황과 달리 이런 경우에 발생할 수 밖에 없는 지연을 최소화하기 위함이었다. 관람을 하는 나의 신체, 인지, 심리 상태를 최대한 의식하는 동시에 관찰과 기록이 관람에서의 다양한 선택과 의지에 인위적인 영향을 미치지 않도록 애쓰며 걸음을 떼었다. 

그렇게 수행한 나의 관람 기록은 감각, 지각, 해석, 선택, 생리현상, 기억이나 정보의 환기, 감정, 새로운 지식, 선호, 상상, 감각의 확장이라는 몇 가지 요소로 정리될 수 있을 것 같다. 나의 눈에 보이는 것, 공간의 깊이, 소리 등을 내 몸이 받아들이는 일차적인 감각은 나의 이동과 인지 능력에 따른 다양한 작용을 통해 지각 단계로 발전한다. ‘방 안에 들어가 보고서야 망점과 철판임을 알았다. 다시 나가서 아까 슬쩍 본 원기둥 빛이 가까이 가보니 벨트 직물, 막힌 원기둥’이라고 적었듯이 작품과 거리를 좁혀가는 과정에서 구체적으로 인식되는 이미지 정보를 통해 대상을 정확히 지각하게 된다. 지각된 정보는 의미를 파악하고 구조화하여 이해하는 해석으로 이어지는데 종종 실패하기도 한다. ‘나무 구조에 적힌 문구를 읽는다. 그치만 다음 글자 하나하나 넘어가며 이전 글자가 기억에서 사라지는 듯 내게 총체적인 의미가 생성되지 못한다.’ 이러한 관람의 흐름에는 관객의 선택 또한 중요하게 작용한다. ‘(작품번호) 7, 8, 5, 4가  모두 보이는데 5는 두고 보아야 할 것, 8은 휘황찬란한 것’이라고 적었듯이, 앞으로 나아가며 관람의 순서와 시간을 계획하는 선택에 의해 관객들은 전시장에서 저마다의 관람 경험을 만들어낸다.

이 선택에 영향을 미치는 다양한 변수들 중에 나에게 두드러진 것은 화장실을 방문하고 싶은 생리현상이었다. 전시장을 배회하는 나에게 내심 환기되는 생각과 감정들도 있다. 도면 여기저기에 적인 작품 번호 ‘4’들을 보았을 때, 숙소에서 친구들과 루미큐브를 하면서 4번 패가 너무 나오지 않아 애를 먹었던 어젯밤을 떠올리며 괜히 헛웃음이 나왔고, ‘엘리베이터가 자본주의의 내장'이라는 작품 설명을 읽고 영화 〈팩토리걸(Factory Girl)〉에서 에디 세즈윅(Edie Sedgwick)의 조부가 엘리베이터 사업을 했다는 얘기를 하는 장면과 그 영화가 그린 60년대 미국의 풍요가 머릿속에 스쳤다. 

이러한 기억과 정보의 환기는 작품 그 자체와는 무관하게 특정한 감정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5번 사진 작품 속 벽지 장식을 보고 고급 패턴벽지 브랜드의 인스타그램 광고가 생각났다. 덩달아 그 브랜드의 지속적 생산성과 내 인생의 비효율성을 비교하며 우울했던 그때의 감정까지 환기되었다. 이 밖에도 작품 사이를 거니는 관객에게 발현되는 생각과 감정의 종류는 분명 많을 것이다. 이 전시를 통해 부산의 작가 임호를 처음 알게 되었듯이 새로운 지식을 얻기도 하고, ‘노원희 좋아하네 나' 라고 메모를 적으며 어떤 작가의 회화에 대한 선호를 갖게 되기도 하며, 11번 작품 하나하나를 사진으로 연신 찍어대는 관객을 보며 ‘저 분은 이게 뭐가 좋을까?’ 상상해본다.

이렇게 나는 전시장을 돌아다니며 생각과 감정의 소일을 지루해하기도 하고 소소히 즐기기도 한다. 그러다가 아주 가끔 관람 경험의 평이함을 넘어서는 최고의 순간과 만나기도 하는데, 나에게는 그때가 바로 감각의 확장을 느끼는 순간이다. ‘너무 좋다. 실제 방영과 깨트림을 머리속으로 상상. 멀어지는, 머리 공간이 커지는 느낌. 남자 독백 테이밍 더 드래곤 앨범 노래에 나온 가사같아. 여러번 듣다보니 정말 그 가사야. 와 이거 너무 좋다.’ 5번 작품의 영상을 보며 나는 여러 시대를 걸쳐 팽창해 온 미디어 이미지와 자본주의 시스템에 균열을 내는 막간의 순간들을 내 온몸을 동원하여 상상했다. 그리고 그 시스템을 보고 듣고 숨쉬며 체득한 내 몸에도 1분 미만의 균열들이 가해지는 듯 했다. 해방감. 그래서 확장되는 느낌. 그래서 너무 좋은. 

내 의지와 상관없이 사라져버리는 장면들을 기억하기 위해 종이에 적으며 공연을 보던 때가 있었다. 비단 장면들을 기억하기 위해서만이 아니었다. 그 장면들로 인해 나에게 이는 정동의 연원을 알고 싶었다. 그 추적을 위해서는 내가 무엇을 보았는지, 무엇 다음에 무엇이 나타났는지가 공연이 끝난 뒤에 내 기억에서 뒤엉켜버리지 않도록 해야한다는 생각이었다. 그래야 그 다음에, 내가 그것을 어떻게 보았는지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객석을 나와 집에 가는 길에도 이어지는 감동과 여운이 정확히 무엇인지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내 몸에 남은 그 감각을 잃지 않을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내심 그렇게 해서 그 공연을 갖고 싶었던 것 같다. 스코어를 통해서. 

전시장의 경험을 다시 마주하는 수단으로서 스코어는 여전히 유용하다. 오히려 더 필요하다. 위 글에서 알 수 있듯이 전시장에서 관객의 경험은 다양한 변수에 따라 다르게 완성되기 때문이다. 모든 다른 몸으로 모두 다른 회차의 공연을 완성하는 것과 같은 이 경험은 매번 다른 스코어로 작동한다. 다른 몸과 기억, 인지, 걸음으로 작품을 보고 옆 사람과 대화하고, 또 다른 사람의 대화가 내게 들려오고, 그것이 감상에 영향을 주기도 하는 등 다양한 사회적 과정 속에서 각자의 즐거움, 혹은 최고의 순간을 발견하는 시간. 그 시간은 지나가버리지만 분명 무언가 몸 안에 남는다는 막연한 믿음이 있다. 그래서 창작자의 몸 밖으로 나와 작품의 몸을 입고 다시 관객의 몸에 스민 그 무언가를 다시 꺼내 가시화하기 위해 글을 쓰고 동선을 그리고 대화를 한다. 그렇게 해서 내가 얻은 아름다움을 잃지 않고, 갖고 싶고, 또 나누고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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